예전엔 임금께 바쳤지, 누에고치서 뽑아낸 ‘순백의 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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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허씨비단 댓글 0건 조회 199회 작성일 22-01-24 12:34본문
경북 상주시 함창읍의 한 명주 길쌈 농가에서 명주 장인 허호(63)씨가 새하얀 명주 원단을 햇볕에 말리고 있다.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만드는 명주는 고급 비단으로, 한복 등을 만드는 데 쓴다. ‘함창 명주’는 실에 물을 먹여 짜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 내구성이 좋고 질감이 부드럽다. /김동환 기자
경북 상주
“전통 방식이 질감·내구성 좋아”
5대째 가업 잇는 명주의 장인
“씨실에 물 먹여 짜야 최고 제품”
한복·스카프·배냇저고리에 쓰여
함창읍에 명주 테마파크
박물관·한복진흥원도 이곳에
내달까지 상주농잠학교 100년展
지난 19일 찾은 경북 상주시 두곡리엔 천연기념물 제559호인 ‘상주 두곡리 뽕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추정 수령 300년, 높이 12m에 이르는 이 뽕나무는 과거 누에를 치고 명주(비단)를 만들던 상주의 잠사업(蠶絲業)과 명주 길쌈을 상징하는 문화재다. 잠사업은 누에를 기르는 양잠(養蠶)과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제사(製絲)를 통칭하는 말이다. 뽑아낸 실로 명주를 만드는 것을 명주 길쌈이라 부른다. 지금도 봄이 되면 이 나무에 피는 뽕잎을 먹으러 누에들이 몰려드는데, 그 누에들이 만들어내는 누에고치가 30㎏에 달할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상주 함창읍에 있는 한 명주 길쌈 농가에선 베틀로 실을 엮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작업장 한쪽 대야엔 뜨거운 물에 불린 새하얀 누에고치가 가득했다. 이곳 명주 장인 허호(63)씨가 소형 빗자루 모양의 도구인 ‘색서비’로 이를 휘젓자 거미줄 같은 실이 줄줄 뽑혀져 나왔다. 이렇게 뽑힌 실을 베틀을 이용해 가로세로로 엮어 명주를 만든다. 가로로 짠 실은 씨실, 세로로 짠 실은 날실이라고 부른다. 엮인 실들을 햇볕에 건조해 완성된 명주 원단은 한복과 스카프, 배냇저고리, 수의(壽衣) 등의 재료로 쓰인다. 이곳에서는 나무 베틀을 사용하고, 씨실에 물을 먹여 명주의 조직을 견고하게 만드는 전통 제조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5대째 명주 제작 가업을 잇고 있는 허씨는 “물을 먹인 씨실이 날실과 만나면 한층 자연스럽게 결합되기 때문에 함창 명주는 다른 옷감보다 질감이 부드럽고 내구성도 좋다”며 “세상이 변해도 전통 제조 방식을 유지하는 이유”라고 했다.
◇임금님께 진상한 ’함창 명주’
경북 상주는 예로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렸다. 상주의 특산물인 쌀·곶감·명주가 모두 하얀색을 띠는 데서 유래했다. 상주에서는 누에고치의 실을 원료로 하는 명주를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전통 섬유 중 모시는 모시풀, 무명은 목화 등 식물성 원료로 만들지만 명주는 유일하게 동물성 원료를 쓴다는 특징이 있다.
경북 서북부 지역에 있는 상주는 5~9월 평균기온이 18~26도 내외이고, 연간 평균 강수량이 800~1200㎜로 뽕나무가 자라기 좋은 조건을 가졌다. 조선 시대 기록인 ‘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상주에서 왕에게 바친 공물 중 첫째 목록에 명주의 옛 명칭인 ‘면주(綿紬)’가 기록돼 있을 만큼 잠사업이 주력 산업이었다. 1921년 일제는 전국 최초로 상주에 양잠 사업을 가르치는 ‘상주공립농잠학교’를 설치하기도 했다.
정부에서 잠사업을 장려하던 때인 1974년 당시 상주의 양잠 농가는 1만5395호로, 누에고치만 112만㎏을 생산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함창읍의 함창전통시장에선 1980년대까지 전국 최대 규모의 명주전(明紬廛)이 열리기도 했다. 충남 서천의 한산모시, 경북 안동의 안동포 등과 함께 명성을 얻으며 “명주는 함창 명주가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잠사업은 화학섬유의 발전, 생산자의 고령화 등으로 80년대 이후 침체기를 겪었다. 누에고치나 명주 수요도 줄어들면서 잠사업을 포기하는 농가도 늘어났다. 하지만 2009년 상주에서 명주를 생산하던 농가들이 힘을 합쳐 ‘명주잠업영농조합법인’을 세워 명주의 명맥을 이어나갔고, 상주시가 이들을 지원하면서 다시 양잠 농가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기준 상주시의 누에고치 생산량은 2610㎏으로 경북 전체 생산량의 31%를 차지한다. 경북 영덕에 이어 둘째다. 경북 농업자원관리원 잠사곤충사업장 관계자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누에고치 대부분이 상주·영덕 등 경북에서 생산·공급되고 있다”고 했다.
◇농잠학교 개교 100주년 전시회도
상주시는 잠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함창읍에는 잠사업과 명주 길쌈을 주제로 한 ‘함창명주테마파크’가 조성돼있다. 테마파크에는 함창 명주의 역사를 주제로 한 ‘명주박물관’, 누에를 연구하는 ‘경상북도농업자원관리원 잠사곤충사업장’이 있다. 국내 유일의 한복 전문 연구·전시 기관인 ‘한국한복진흥원’도 이곳에 있다.
함창 명주 장인 허호씨가 나무 베틀로 명주를 짜고 있다. /김동환 기자
시는 또 양잠 농가들이 누에를 활용한 누에 가루·누에환, 뽕잎을 이용한 뽕잎차·뽕잎 가루 등 건강 식품을 개발하는 것도 지원하고 있다. 익은 누에인 숙잠을 수증기로 쪄서 건조한 ‘홍잠(弘蠶)’도 치매와 간암 예방에 좋은 식품으로 인기다. 지난해 10월 누에고치의 실을 직접 뽑아보는 체험 키트도 나왔다. 누에고치 2개를 뜨거운 물에 불린 뒤 고치가 연해지면 나무젓가락으로 실을 감아 올리는 방식이다. 이 체험 키트는 약 3달 만에 3000개가 팔렸다고 한다.
상주박물관에선 오는 2월 27일까지 상주공립농잠학교 개교 100주년을 주제로 명주 길쌈 등과 관련된 전시회를 개최한다. 2008년 경북대 상주캠퍼스 생태환경대학으로 통합된 상주공립농잠학교는 개교 이후 상주의 잠사업과 명주 길쌈 발전을 이끌었다. 전시회에서는 과거 농잠학교 재학생 등의 기록물, 명주 길쌈에 쓰이는 도구, 명주로 만들어진 옷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강영석 상주시장은 “상주의 명주가 잊혀져가는 우리 전통을 되새기는 문화유산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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